“너무 대기업과 출연연만 바라봤어요” 한 명문대 박사의 후회

2008년 11월 10일 00:00
통계청은 9월 우리나라의 청년실업률이 6.1%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이공계 실업률은 평균보다 2~3% 포인트가 높다는 통계를 내놨습니다. 2006년 과학기술부는 이공계 실업률이 16.6%에 달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더사이언스는 창간기획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과학기술계 유휴인력의 목소리를 듣고 대책을 모색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유휴인력과 인터뷰한 후 글의 전개상 임의로 가상 인물 A와 B, C를 만들었습니다. A씨는 ‘上편-개인의 문제인가’에서 일자리를 못찾는 현실을 개인 차원에서 돌아보고, B씨는 ‘中편-성(性)의 문제인가’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심화되는 취업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또 C씨는 ‘下편-정책의 문제인가’에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기사 가운데 출연연, 대기업, 중소기업에 대한 내용은 과학계 유휴인력의 인식을 반영했으며, 이에 답한 관계자들은 요청상 소속과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 A씨, 현실을 직시하다 “본의 아니게 박사 학위 받은 뒤 2년째 놀고 있네요. 아, 놀고 있는 것은 아니죠. 많은 돈을 받지는 않지만 시간강사를 두개 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학원 강사 자리라도 찾아볼 생각이에요. 내후년에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거든요.” 명문대로 불리는 대학의 이공계 대학원을 졸업한 A씨는 계속 걱정이다. 졸업한 지 2년이 지나자 정부출연연구원(출연연)과 기업에 입사원서를 내도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탈락하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 박사 학위를 받고 이미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그는 요즘 부쩍 한숨이 늘었다. 실제로 이공계 박사급 인력도 취업난을 피해갈 수는 없다. 2007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이공계 박사의 노동시장 특성과 유동성 분석’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국내 이공계 토종박사의 실업률은 평균 4.3%로 미국(2.9%)이나 독일(0,4%)에 비해 높다고 발표했다. “제가 연구개발(R&D) 분야 직종에만 원서를 써서 떨어진 것 같아요. 어느 연구소나 기업이 연구를 2년씩이나 쉰 사람을 뽑겠어요? 매년마다 실험의 감을 잃지 않은 새로운 인력들이 쏟아지는데 차라리 그들을 뽑죠.” 안타깝게도 A씨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모 출연연의 책임연구원급 관계자는 “연구를 쉬었던 사람보다는 대학원의 연구를 이곳에서 연장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을 빨리 배우는 것 같다”며 “가장 이상적인 사례는 A씨가 대학원에서 연구한 논문이 연구단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때”라고 밝혔다. 연구단은 저마다 특수한 실험 장비를 사용한다. 따라서 대학원에서 이를 다뤄본 신입 연구원일수록 연구단에 빨리 적응할 수 있다. A씨는 이를 보고 “출연연에는 ‘학연’이 존재한다”고 했지만 출연연 관계자들은 “관련 연구를 하는 대학의 실험실에서 인력을 뽑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SCI급 논문은 내 이력의 날개 A씨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여러 중소기업에서 그를 원하는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의 학과는 전산, 반도체, 생명공학 등 당시 잘나가던 분야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A씨의 성에 차지 않았다. A씨는 계속 연구를 할 수 있고 대우도 좋은 출연연이나 대기업에만 관심이 있었다. 여러 중소기업이 구애할 정도면 출연연과 대기업에서도 그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인기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출연연이나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대개 SCI급 저널에 논문을 발표했거나 원천기술로 개발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동료들이었어요.” A씨는 ‘네이처나 사이언스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전공 분야에서 알아주는 저널에 논문이 실린 학생들은 수월하게 출연연이나 대기업에 갔다’고 회상했다. 이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일부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는 이상 석·박사 기간 중 특출난 성과를 얻지 못하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힘들다. 휴대전화를 만드는 국내 굴지의 기업 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 통신공학박사는 수두룩하다”며 “함께 일할 사람이라면 학교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낸 인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석사급 이상에만 연구소 취업의 기회를 주는 이 회사는 석·박사 논문을 평가하는 1차 서류전형에 통과하기도 어렵다. 1차 전형을 통과해도 연구주제에 대한 발표를 하고 면접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점검 받아야 한다. 관계자는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연구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정비례하는 인재가 많다”며 “이런 친구들이 갓 입사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뻥뻥 터뜨릴 때 간담이 서늘해지면서도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도 이를 알기 때문에 역량 있는 박사급 연구원은 일반 신입사원 연봉의 3배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 경력 단절이 가장 큰 후회 사실 A씨는 대기업 연구소의 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이곳은 일이 너무 고되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며 자기 위안을 했다. 실제로 A씨의 친구 중에는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 연구소를 1~2년 만에 박차고 나온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개 이런 친구들은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면 곧바로 다른 기업에 취직했다. 대기업 연구소에서의 경력이 A씨에게 없는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이다. “중소기업에서라도 연구를 계속하며 경력을 단절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죠. 하지만 10년 동안 고생해서 명문대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상대적으로 대우가 뒤처지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기로 마음먹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솔직히 부모님이나 아내 보기 부끄러운 것도 있구요.” A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다른 친구들은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하고 일부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는 학원 강사 일자리를 찾는 편이 가장 나은 것 같아요. 다시 공부를 하거나 외국으로 가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죠. 부모님의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부양할 아내와 자식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다행이에요. 제 학벌 정도면 어느 학원을 가도 무시 받지는 않거든요. 이름 없는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친구들보다는 제가 낫겠죠.” 현실을 직시했다는 A씨.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걱정해주는 친구들은 대부분 졸업과 동시에 중소기업에 취직하거나 일찌감치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명문대 박사라는 그의 신분이 오히려 선택의 폭과 사고의 경계를 줄여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전동혁 동아사이언스 기자 jer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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