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날

2007년 09월 04일 17:06
과학데이와 김용관 한개의 시험관은 전세계를 뒤집는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과학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자.”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1934년 4월 19일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날이었던 ‘과학데이’ 때 외쳤던 말들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조선의 선각자들은 나라를 되찾으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물산장려회 등을 조직해 국산품을 애용함으로써 민족자본을 육성하려고 했던 것도 이 때문. 하지만 과학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경제적 자립이 쉽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과학데이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김용관(1897-1967). 1918년 경성공전 요업과를 1회 졸업한 그는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었다. 그는 조국을 근대화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보고, 1924년 경성공전 동기인 현득영, 박길용 등과 더불어 발명학회를 설립했다. 발명가를 양성하고 발명을 공업화하기 위한 이화학연구기관을 설립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교육여건이 부실한 조선에서 발명가가 많이 나올리 없고, 이 때문에 발명학회는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었다. 김용관은 침체된 발명학회를 재건하기 위해 1932년부터 학계, 언론인, 문인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변호사로서 조선변호사협회장을 지냈던 이인(1896-1979), 시인 주요한(1900-1979)과 시조시인 이은상(1903-1982), 독립신문 사장을 지냈고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교육운동에 힘썼던 정치가 윤치호(1865-1945) 등이 그런 인사였다. 새롭게 개편된 발명학회는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면서 새로운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일종의 과학계몽운동이자 과학문맹 퇴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관은 과학조선에 게재한 ‘과학의 민중화’라는 글에서 “우리 조선과학계도 각 전문 대가가 통속(대중)저술에 힘쓰고 통속강연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통속과학잡지가 있어야 그 전도가 점차 발전될 것”이라며 과학대중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34년 2월 28일 발명학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31명의 사회 저명인사들은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YMCA 회관)에 모였다. 이날 그들은 과학 대중화를 위해선 과학데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사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당시 일반인들에게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1809-1882)의 서거일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다. 제1회 과학데이를 맞기 앞서 4월 16일부터 3일간 김용관은 매일 오후 7시 반에 라디오에 출연해 과학지식 보급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과학데이인 4월 19일 밤 8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는 8백여명의 인사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기념식이 거행되고 밤 늦도록 3개의 대중과학 강연이 이어졌다. 20일에는 과학관, 영등포방직공장, 중앙시험소, 중앙전화국 등을 견학하고, 21일에는 수공동 보통학교에서 과학활동사진을 상영했다. 당시 동아일보 등 3대 일간지는 사설과 기사를 통해 적극 후원해 주었다. 제1회 과학데이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결국 조선중앙일보사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1886-1947),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1889-1945), 보성전문(현 고려대) 교장 김성수(1891-1955), 이화여전 교수 김활란(1899-1970) 등 당시 내로라하는 1백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과학지식보급회’가 7월 5일 서울 공평동 태서관에서 결성됐다. 이후 과학지식보급회는 발명학회에서 운영하던 ‘과학조선’을 인수하고, 지방순회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조선 과학대중화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35년 과학지식보급회가 주관한 제2회 과학데이는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과학데이라는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차가 종로에서 안국동을 돌아 을지로를 행진했고, 군악대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김억(본명은 김안서)이 짓고 홍난파(1891-1941)가 작사한 ‘과학의 노래’를 연주했다. “새 못되야 저 하늘 날지 못노라/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후렴)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간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19일 밤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경성보육학교 합창단은 또 한번 과학의 노래를 불렀고, 일제하 최고의 정치가였던 여운형은 ‘과학자에게 고하는 일언’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러나 과학지식보급회와 과학데이는 얼마 가지 않아 막을 내려야 했다. 누가 봐도 독립운동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과학대중화운동을 일제가 가만히 두고보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1937년부터 과학데이 행사를 옥외에서 개최하는 것을 막고,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던 김용관을 체포했다. 김용관이 옥에 갇히자 과학데이운동을 주관하던 과학지식보급회도 해체됐다. 또한 발명학회는 곧바로 일본발명학회 조선지부로 흡수돼 친일단체로 변했고, 일제는 물자절약과 전시 대용품의 발명을 장려하는데 이를 이용했다. 과학데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으며, 우리 민족이 펼쳤던 과학대중화운동의 뿌리이다. 그래서 뜻있는 학자들은 4월 21일(1967년 과학기술처가 생긴 날)인 과학의 날을 4월 19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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