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생각

2016년 11월 26일 18:00

 

‘하양’ 생각 - GIB 제공
‘하양’ 생각 - GIB 제공

인쇄소에서 컬러 책을 인쇄할 때는 네 가지 기본 색인 ‘블랙(black), 사이언(cyan), 마젠타(magenta), 옐로(yellow)’를 적절히 섞고 분해해서 원하는 색상을 맞춰 연출해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네 가지 색의 조합으로는 ‘하양색’은 인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디자인상 하양색이 필요하면 대개는 종이 자체의 색상(흰색 종이)을 통해 표현한다. 그러나 종이의 재질 선택 문제로 흰색 종이를 사용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 굳이 하양색을 표현하려면 인쇄를 마친 다음에 별도로 ‘백박’(白箔, white foil) 등의 추가 가공을 해야만 한다. 그러고 보면 하양색은 색(色)이 시작되기 이전의 색이기에 ‘있으면서도 없는’ 색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성질의 ‘하양색’은 ‘순결성’을 떠올리게 한다. 흰 꽃인 백합, 백장미, 백철쭉, 찔레꽃, 흰민들레 등을 만날 때도 그렇거니와 청명한 가을날 새파란 하늘에 뜬 뭉게구름을 올려 볼 때도, 그곳에서 머잖아 쏟아져 내릴 첫 함박눈이 지운 길을 바라볼 때도, 방금 따른 맥주 거품에 입술이 잠길 때도, 예쁘게 깎아놓은 생밤을 집을 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두부 찌개를 마주할 때도 그 ‘하양색’은 새 지우개가 되어 때 묻고 헝클어진 탁한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겨울이 되면 우리 집 식탁에는 끼니때마다 ‘하양’이 놓인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동치미’이고 다른 하나는 ‘백김치’이다. 그 두 ‘하양’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엔 12월 초순에 김장을 담글 것이다. 물론 고춧가루로 버무린 김장김치가 우선이겠지만, 그 마지막 순서로 담그는 백김치와 동치미는 거의 나의 입맛을 위한 일이다. 나는 옅은 빨강 물이 밴 포기김치나, 생굴을 넣고 버무린 심심한 겉절이나, 두세 쪽으로 갈라야 먹음직한 총각김치나, 두어 번 잘라 씹어야 할 큼직한 깍두기도 좋아하지만, 젓갈이 아닌 소금만으로 간을 맞춰 발효시킨 담백한 백김치와 동치미를 유난히 좋아한다. 그것에는 고춧가루와 젓갈과 생새우 등의 여러 다양한 양념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깊고 화려한 맛은 없지만, 배추와 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식물성’의 본질적인 풋맛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GIB 제공
GIB 제공

 그렇다, 그 맛은 ‘풋맛’이다. ‘처음’이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인 ‘풋-’이기에 동치미와 백김치는 ‘있으면서도 없는’ 색상인 ‘하양’과 어울리고 실제 색깔도 ‘하양색’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한 날, 청각(靑角)과 짙푸른 고추가 둥둥 떠 있는 동치미 무를 꺼내 야트막한 동산 모양으로 길게 이등분한 다음 다시 반달 모양으로 얇게 잘라 한입에 베어 물 때, 입속에서 오독오독 씹히는 그 식감(食感)은 내게는 삶의 위로가 된다. 또한 밥 한술에 이어서 노릇한 배춧잎이 달린 배추 한 잎을 간이 밴 쪽파와 생강 쪽과 함께 둘둘 말아 한입에 넣어 씹으면, 마치 밤새 언 눈길을 아침에 밟으며 걸을 때처럼 그 소리가 사각사각 입안에 울린다. 그 울림이 입 밖으로 새 나가지 않는 듯 곧바로 자꾸 귀청에 닿을 때면 적막한 산중의 목탁 소리처럼 들려와 마음이 착해지는 것 같다.

 

그런 ‘위로’나 ‘성찰’의 마음은 어쩌면 동치미나 백김치의 담백하고 고유한 ‘맛’에 앞서서 ‘하양’이라는 공통된 색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양’이 상징하는 순결성에 마음과 눈길이 끌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 올해 연말 밤에는 예년처럼 또 하나의 하양인 ‘소면’(素麪)을 삶고 찬물에 헹궈 동치밋국에 말아 먹으며 그야말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하여 길고도 짧았던, 나와 우리의 한 해를 가만히 되돌아볼 것이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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