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실증’으로 사회가 엉망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016년 11월 28일 13:30

 

 

포커스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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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서, 저는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온종일 뉴스를 도배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정부패, 무능하고 부당한 권력에 희생당한 수많은 가치,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 열심히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 정신과 전문의가 답합니다!


● 바쁜 분들을 위한 4줄 요약


1. 삶은 피할 수 없는 부조리의 연속이다.
2.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병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3. 우리는 숙명적인 세상의 부조리함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4. 그러나 절망의 순간, 진정한 삶의 의미가 우리에게 살짝 몸을 드러낸다.

 


▶ 답변

점입가경입니다. 도저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난장판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이미 저 멀리 가버린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하는 진화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별로 바뀌는 것도 없고, 처음에 경험한 의분도 점점 시들해 집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은 무력감, 이른바 ‘순실증’이 고개를 듭니다.

 


삶은 부조리의 연속


흔히 한글 성경책에 고린도라고 표기되는, 코린토스라는 그리스의 한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를 세운 왕이 시지푸스(Sisyphus)입니다.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죽음의 신을 꽁꽁 묶어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을 농락한 죄로 벌을 받게 됩니다.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벌이죠. 하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면,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영원히 바위를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부조리(absurdity)라는 말은 어떤 것이 실제로 있을 수 없고, 모순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이러한 부조리가, 바로 인간 삶의 기본적 조건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과 무의미한 거짓말, 그리고 부당하고 억압적인 관계…. 그러나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높은 권력층에서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은 끊임없이, 그리고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그 누구도 이러한 부조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5년 전, 혹은 10년 전 신문을 들춰보십시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 문자로 기록된 이후, 쉬지 않고 반복되는 일입니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주목받는 권력자’의 일은 아니지만, 소시민의 하루하루도 어리석은 꾀임과 작당, 옳지 못한 일과 부당한 관계의 연속입니다.

 

시지프스(Sisyphus).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적인 인간만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 운명을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부조리한 세상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 즉 부조리의 역설이라고 한다. - Titian (1490-1576) 제공
시지프스(Sisyphus).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적인 인간만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 운명을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부조리한 세상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 즉 부조리의 역설이라고 한다. - Titian (1490-1576) 제공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의 병적인 반응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침착하게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정상적인’ 인간은 병적인 상황, 특히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몇 가지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은 ‘혐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과 이웃, 심지어는 세상 모두를 혐오하게 됩니다. 이러한 혐오감은 무분별한 증오와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아지고, 그런 일에 ‘걸핏하면 욕을’ 하고, ‘쉽게 주먹을 휘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감각’해지기도 합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 그리고 하루 종일 계속되는 뉴스 보도에도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듯이, 종종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하루를 살아갑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의 ‘무감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방금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감정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 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가지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독일 빈의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1942년 게토에 강제 이주되고 1944년에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다. 여동생을 제외한, 어머니와 형, 아내는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저술했다. - Lt. Arnold E. Samuelson(1945) 제공
독일 빈의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1942년 게토에 강제 이주되고 1944년에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다. 여동생을 제외한, 어머니와 형, 아내는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저술했다. - Lt. Arnold E. Samuelson(1945) 제공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태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 지 모른다는 망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주인공, 찰스 다네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깜박 잠이 듭니다.


“장밋빛으로 펼쳐진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소호의 옛집으로 돌아간 그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는 아내, 루시 마네뜨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과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루시가 그간의 일은 모두 꿈이며, 그는 한번도 런던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내가 죽는 날이 밝았구나.”


삶의 부조리에 무감각해진 우리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집행유예 망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과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혹은 잘못된 종교적 믿음, 현학적인 논리 등을 통해서, 자신만은 자유롭다고 혹은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마 명백한 범죄로 수사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발뺌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집행유예 망상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맘대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의 말처럼, ‘세상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처럼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를 저지르는’ 식으로 세상을 제멋대로 바꾸어서도 안되지만, 반대로 선하고 옳은 방향이라고 해서 세상이 반드시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왜 얼른 ‘내 뜻대로’ 세상이 바뀌지 않느냐고 항의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태도뿐입니다.

 

종종 타조는 포식자를 만나면, 머리를 모래에 파묻는다고 알려져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문제가 마술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흔히 집행유예 망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타조가 땅에 머리를 박는 이유는, 둥지 속의 알이 잘 부화되도록 뒤집으려는 ‘합리적’ 행동이다. - Fwaaldijk (2010) 제공
종종 타조는 포식자를 만나면, 머리를 모래에 파묻는다고 알려져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문제가 마술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흔히 집행유예 망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타조가 땅에 머리를 박는 이유는, 둥지 속의 알이 잘 부화되도록 뒤집으려는 ‘합리적’ 행동이다. - Fwaaldijk (2010) 제공

절망의 순간, 살짝 몸을 드러내는 진정한 삶의 의미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작곡가 F가 꿈을 꾸었습니다. 1945년 3월 30일에 수용소에서 해방되고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계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F는 3월 29일부터 갑자기 열이 나더니, 이틀 만에 발진티푸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약속된 그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기대한 해방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죽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지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삶의 운명에는, 지하정부에서 꾸민 음모도, 거대한 역사의 정해진 방향도 없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를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의 삶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삶과 닮았습니다. 언제 해고될 지, 언제 이혼당할 지, 언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지 알지 못한 채, 위부터 아래까지 온통 부조리한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세상에 대해서 종일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분노합니다. 어떤 이는 혀끝에서 맛있는 것,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일만 생각하며, 세상으로부터 도망칩니다. 허황된 축복과 믿을 수 없는 내세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도 합니다. 얕은 지식과 현학적 수사를 남발하는 냉담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절망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하고 일시적인 삶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프랭클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시련에서 구해줄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태도, 즉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만이 이방인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SNS에 흔히 돌아다니는 출처 불명의 사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다(the meaing of life is to give life meaning)’라는 메시지는, 빅터 프랭클의 실존적 조언을 함축하고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다. - unknown 제공
SNS에 흔히 돌아다니는 출처 불명의 사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다(the meaing of life is to give life meaning)’라는 메시지는, 빅터 프랭클의 실존적 조언을 함축하고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다. - 작자미상

에필로그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억압해 온 분노가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다같이 겪고 있는 일이지만, 개개인에게 주는 의미는 서로서로 다릅니다. 부조리한 인간의 삶과 그 조건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삶의 상황에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화를 내며, 폭력적인 행동으로 답할 수도 있습니다.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적인 상황타개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도, 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파국적인 예상을 할 수 도 있겠죠.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 참고문헌
Leeming, David A (2015) Encyclopedia of Psychology and Religion. Springer
Frankl, Viktor E. (2005)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청아
Camus, Albert (1990) 시지프스의 신화. 서울: 육문사
이서규 (2013) 카뮈의 부조리철학에 대한 고찰. 철학논집 35.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139–178.
찰스 디킨스 (2016) 두 도시 이야기. 서울: 드림북.

 

※편집자주: 살림살이 좀 어떠십니까? 뉴스를 보면 도처에 안좋은 소식 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취업 걱정, 중장년 층은 노후 걱정에 노심초사합니다. 경제, 정치 심지어 날씨까지 우리 편은 없어 보입니다. 본지는 인류학을 전공한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한번쯤 고민할 법한 주제를 선정, 지면을 통해 상담을 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마음에 품고 사는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 성안드레아 병원 정신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경희대 의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대부속병원 전공의 및 서울대병원 정신과 임상강사로 일했다.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및 이화여대, 경희대 의대 외래교수를 지내면서,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 중이다. 현재 호주국립대(ANU)에서 문화, 건강 및 의학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2014)을 번역했고, '재난과 정신건강(공저)'(2015),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2016)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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