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권력에 대한 우리의 저항을 예견? ‘브이 포 벤데타’

2016년 12월 06일 18:00

 

 

브이 포 벤데타에서 가이 포크스 분장을 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제공
브이 포 벤데타에서 가이 포크스 분장을 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제공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대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땐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中

 

<브이 포 벤데타>는 1988년 DC코믹스에 의해 출간된 그래픽 노블 명작 중 하나다. 그래픽 노블계의 전설인 앨런 무어(글)와 데이빗 로이드(그림)가 만든 이 작품은, 대처리즘의 그림자 아래 신음하고 있던 80년대 영국의 상황을 SF적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들을 뒤섞어 그려냈다는 면에서 문학적으로도 높게 평가 받았다.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정부주의자 V는 영국 역사에서 저항과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가면을 쓰고 다니며 V자 표식을 남기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 작품과 그 주인공 V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이 포크스란 인물을 먼저 이해해야한다.


오늘 날 남자, 사람을 칭하는 단어인 ‘Guy’의 어원이 된 이름을 가진 ‘가이 포크스’는 영국 왕실에 불만을 품고 테러 계획을 실행하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그 테러 계획이란 카톨릭을 배척하고 성공회를 우대하던 제임스 1세는 물론 대신들과 의원들까지 모두 살해하기 위해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발각된 1605년 11월 5일의 이른바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을 말한다.


그 이후 매년 같은 날 영국 이곳 저곳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는데, 이는 훗날 ‘가이 포크스 데이’라는 일종의 축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곤 언제부터인가 불꽃놀이와 함께 참가자들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행진을 하는 행사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가이 포크스와 그의 가면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서 저항과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표지 - DC COMICS 제공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표지 - DC COMICS 제공

그런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아나키스트이자 테러리스트인 V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계기는 사실 원작 그래픽 노블보다는 2005년 개봉된 동명 영화 때문이었다.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성전환 수술을 마친 자매)가 <매트릭스> 시리즈의 큰 성공 이후 제작을 맡은데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을 연기해 주목을 받은 휴고 위빙과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을 맡아 개봉 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핵전쟁으로 전세계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1990년대 영국을 전체주의 정부가 지배한다는 설정의 원작과는 달리, 2000년대 중반이라는 제작 시점을 반영하여 영화는 미국이 두 번째 내전을 치르면서 초토화되고 유럽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로 신음하는 2020년대 후반의 전체주의 국가 영국을 무대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원작에선 독재자 아담 수잔이 통치에 사용하던 인공지능 컴퓨터 Fate와 사랑에 빠진다 - DC COMICS 제공
원작에선 독재자 아담 수잔이 통치에 사용하던 인공지능 컴퓨터 Fate와 사랑에 빠진다 - DC COMICS 제공

또 하나 원작과 영화의 주목할만한 차이점이라면, 영국 전체주의 정부를 이끄는 노스파이어 당의 당수인 아담 수잔(영화에서는 아담 서틀러)에 대한 묘사다. 원작의 아담 수잔은 무솔리니를 연상시키는 외모에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이름부터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영화 속 아담 서틀러는 감정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히스테리컬한 인물로 묘사된다.


더불어 원작 속 아담 수잔의 경우, ‘운명’(Fate)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공지능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설정 또한 영화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특히 원작에서 V가 운명을 해킹하여 이를 통해 테러를 일으키고, 급기야 아담 수잔으로 하여금 운명 자체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다소 급진적인 설정도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이 만들어진 80년대 중반엔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SF적인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효과가 분명 있었지만, 영화는 말 그대로 정치적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 영화는 미디어의 폐해를 부각시키는 아래와 같은 좀 더 현실적인 대사에 방점을 찍는다.


“사람들이 믿을까요?”
“우린 방송국이야. 뉴스를 보도할 뿐 날조하지 않아. 그건 정부가 하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에게 경고를 보내는 어나니머스 - 어나니머스 제공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에게 경고를 보내는 어나니머스 - 어나니머스 제공

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원작으로부터 승계된 네러티브의 힘이 워낙 강력하여, 영화의 개봉 이후 가이 포크스와 그의 가면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적인 저항과 혁명의 상징으로 확산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자신들의 메시지를 외부에 공개하며 경고와 위협의 의미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촛불 시위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착용하고 등장한 시위대 - GORFALAS 제공
국내에서 촛불 시위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착용하고 등장한 시위대 - GORFALAS 제공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와 최근 있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촛불 집회에, 영화 커뮤니티인 DVD프라임 회원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 주목을 끈 사례가 있다. 자각한 시민들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그러나 비폭력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는 면에서, 어나미머스보다도 조금 더 발전된 형태라고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사례라 하겠다.

 

※ 참고
☞ 네이버 캐스트: 가이 포크스

 

※ 필자소개
이철민. 학부에서 계산통계학을 전공하고 국내 IT기업들에 재직하다 미국 유수의 MBA과정에서 경영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회사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국내 사모펀드(PEF)에서 M&A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씨네21』, 『동아일보』, 『한겨레신문』등에 다양한 칼럼을 연재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인터넷 없이는 영화도 없다』, 『MBA 정글에서 살아남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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