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외계인 언어 이해하면 그들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2017년 02월 05일 15:37

[과학기자의 문화산책]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사피어 워프 가설’ 해부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가 외계인과 소통하려 애쓰는 장면. - UPI코리아 제공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가 외계인과 소통하려 애쓰는 장면. - UPI코리아 제공

2일 개봉한 SF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외계인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찐빵처럼 둥글납작하게 생긴 우주선 12척이 나타나 지구 곳곳에 착륙한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18시간마다 한 번씩 작은 문을 열어준다. 각국의 과학자들은 머리에 물음표를 가득 채운 채 우주선 속에 들어가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과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미국의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와 이론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 이들은 미지의 외계 생명체의 신호를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콘택트(Contact 1997)’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상대의 언어에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다.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면 외계인처럼 사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도 달라진다.”


위 문장으로 풀이되는 ‘사피어 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영화 ‘컨택트’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뼈대다.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에드워드 사피어(1884~1939)와 그의 제자 벤저민 리 워프(1897~1941)가 1920~1940년대에 걸쳐 완성한 가설이다. 워프는 이누이트(에스키모) 공동체에 ‘눈(snow)’을 뜻하는 단어가 400가지나 있어 일반인보다 훨씬 섬세하게 눈을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로 검증된 바 있다. 2013년 미국경제학회지(AER)에 발표된 연구가 한 사례다. 영국 예일대 경영대학원 행동경제학과 키스 첸 교수는 언어권에 따라 사람들의 저축성향이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영어의 Uncle(삼촌)이라는 단어가 중국어에서 伯父(큰아버지), 叔父(작은아버지), 舅舅(외삼촌), 姑丈(고모부), 姨丈(이모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현상을 늘 신기하게 생각했다. 중국어는 첸 교수에게 끊임없이 가족 관계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첸 교수는 이 같은 언어 차이가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제’를 중심으로 연구에 나섰다.

 

중국어와 영어는 시제표현이 다르다. - GIB 제공
중국어와 영어는 시제표현이 다르다. - GIB 제공

중국어에는 시제변화가 없다. 어제 비 내리다(昨天下雨), 오늘 비 내리다(今天下雨), 내일 비 내리다(明天下雨)처럼 단순하다. 반면 영어에서는 시제가 중요하다. 어제 비가 왔다(It rained yesterday),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It is raining now), 내일 비가 올 것이다(It will rain tomorrow)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


중국어처럼 현재와 미래가 구분되지 않는 언어를 ‘미래비구분언어(Futureless languages)’라고 한다. 첸 교수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미래의 어느 시점과 현재의 가치를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일정부분 양보할 것’이라고 봤다. 따라서 ‘저축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반면 영어 같은 ‘미래구분언어(Future languages)’를 쓰는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구별해 미래보단 현재 행복에 충실하게 만들 것’이라고 가정했다(즉, 저축을 덜 한다).


조사결과 실제 이런 차이가 드러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34개국과 러시아를 조사한 결과 상관관계가 있었다. 중국어 등 ‘미래비구분언어’를 쓰는 13개국이 영어 등 ‘미래구분언어’를 쓰는 22개국보다 국민총생산의 5%를 더 저축했다. 참고로 한국어는 미래구분언어권 중에서 가장 저축을 많이 하는 나라다.

 

과학동아 제공
과학동아 제공

흡연, 비만, 피임률에도 차이가 있었다. 중국어 등 미래비구분언어 사용자들의 흡연율이 20~24% 낮았고, 비만율도 13~17% 낮았다. 성관계에서 콘돔을 사용할 확률은 21% 높았다. 첸 교수는 “미래를 현재와 동등하게 생각하는 언어권일수록 미래의 기쁨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석했다.


미래 구분 여부 외에 다른 차이를 시사하는 연구도 많다. 한국어에 ‘넣다·놓다·끼다’처럼 대상 간의 공간관계를 뜻하는 어휘가 많아 한국어 사용자가 공간을 잘 범주화시킨다거나①, 일본어 사용자가 형태보다 소재를 기준으로 사물을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들이다②.


※참고 논문

①저널 ‘인지(Cognition)’,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언어학과 최순자, 1991

②저널 ‘인지(Cognition)’, 일본 게이오대 환경정보과 무쓰미 이마이, 1997


●언어 없이 사고할 수 있다는 반론도 


사피어 워프 가설은 발표 당시엔 혁명적인 이론으로 취급받았지만 언어학자들의 공격도 많이 받았다. 단순히 어휘가 많다고 세상을 섬세하게 경험하는 것은 아니며, 정확한 어휘 없이도 세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반론이다.


세계적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사람이 각 나라 언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사고의 언어’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언어와는 독립적인 이 추상 언어를 핑커는 ‘멘털리즈(mentalese)’라고 불렀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언어학과 노암 촘스키 교수 역시 언어와 사고는 독립적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언어학자와 인지과학자 주류는 언어가 사고를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다만 일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인다. 이재호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피어 워프 가설보다 상대적으로 언어의 영향을 약하게 평가하는 가설이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언어의 영향이 지각 세계를 바꿀 정도로 크진 않더라도, 기억의 왜곡 또는 사고의 변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다는 증거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며 “굴러온 돌(언어)이 박힌 돌(사고)을 밀어내는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컨택트’에서 이론물리학자 이안 도넬리가 외계인의 문자를 해석하는 장면. - UPI코리아 제공
영화 ‘컨택트’에서 이론물리학자 이안 도넬리가 외계인의 문자를 해석하는 장면. - UPI코리아 제공

결론짓자면,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다고 해서 외계인처럼 사고방식을 바꾸긴 힘들어 보인다. 성장배경과 생활환경이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처럼 물리법칙까지 거스르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은 있다. 사고방식이 뒤바뀐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진한 감동을 느낀 분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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