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미팅] 별명 부르고 난상토론…‘1인 1발언권’ 민주주의를 경험하다

2017년 02월 26일 21:00

ESC 주최 ‘과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 열려

 

25일 열린 ‘과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 중 과학대중화 정책 분과의 참가자들이 포스트잇에 각자 의견을 적어 전지에 붙이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25일 열린 ‘과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 중 과학대중화 정책 분과의 참가자들이 포스트잇에 각자 의견을 적어 전지에 붙이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한 여성과학자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악착같이 연구해서 성차별을 딛고 성공했는데, 오히려 후배 여성과학자에게 나쁜 사례로 남더래요. ‘저 사람만큼 열심히 하면 되지 않냐’고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 듣고 나니 내가 얼마큼 열심히 해야 할지 혼란이 오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은 모둠원들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는다. 비슷한 고민이 쌓여 이내 제도적 해법으로 주제가 넘어간다. “기관 평가할 때 성평등 지수를 반영하면 어떨까요.” “모든 과학기술인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주는 게 근본적 해법 아닐까요.”


다른 모둠에선 비정규직 청년과학자의 고충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쪽에선 정부 주도의 과학기술정책과 ‘콘트롤타워’에 대한 비판이, 다른 한쪽에선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대중에게 지식만 전달하고 있다는 반성이 이어졌다. 


과학기술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선 후보에게 던질 질문을 만드는 ‘과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이하 타운미팅)’이 2월 25일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가 주최 및 주관하고,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사이언스온 등이 함께했다.


ESC는 3월부터 대선후보들을 초청해 과학기술지원정책의 문제점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공약을 묻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타운미팅은 대선 후보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과학기술인들의 의견을 모으는 자리였다.

 

타운미팅의 한 참가자가 포스트잇에 의견을 적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타운미팅의 한 참가자가 포스트잇에 의견을 적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김 박사, 최 교수’ 아닌 ‘개복치와 펭귄’


개복치, 펭귄, 마라도나, 찰리, 고등어, 딴짓, 쌀값청년, 재활용쓰레기…. 타운미팅 참가자 62명 중 상당수는 이름과 소속 대신 별명을 명찰에 붙였다. 참가자 중 20대~30대가 절반을 넘었고 40~50대와 동등한 발언권을 가졌다. 여타 과학기술인 모임에서는 쉽사리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타운미팅은 원래 대규모 집단에서 분과를 나눠 토론한 뒤 전체 투표로 결론을 정하는 의사결정 방식을 뜻한다. 숙의·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인 형태다. 윤태웅 ESC 대표(고려대 교수)는 “타운미팅이 수평적 소통 방식을 지향하는 ESC의 문화와 일치한다”며 행사 취지를 밝혔다. ESC 타운미팅TF 공동팀장인 ‘재규어(별명)’는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요원들에게 “타운미팅에선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듣고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타운미팅을 4차례 진행해 본 경험이 있는 이강수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실장 등이 이번 행사 실무자로 참여했다. 이 실장은 “타운미팅에선 현장 연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 논의하기 때문에 굉장히 현실적인 의견이 나온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 예로 과학기술기업 정책 분과엔 민간기업 종사자들이 참여해 현장에서 느끼는 고충을 토로했다. 한 참가자가 “기업이 기술 보안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직에 과한 제한을 둔다”며 “대선후보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말하자 다른 참가자들이 공감하며 해당 분과의 질문으로 만들기도 했다. 

 

타운미팅 2부가 끝나고 한 참가자가 분과에서 나온 의견을 전체 참가자 앞에서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타운미팅 2부가 끝나고 한 참가자가 분과에서 나온 의견을 전체 참가자 앞에서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포스트잇에 의견 적어 붙이고 난상토론

 
이번 타운미팅은 7개 분과로 각 10여 명씩 나뉘어 토론이 진행됐다. △청년과학기술자 정책 △신진과학기술자 정책 △정부투자 연구소 정책 △과학기술소수자(여성/외국인) 정책 △과학기술 기업 정책 △과학기술 지원체계 △과학대중화 정책 등이다. 


총 5부로 진행됐는데, 참가자들은 1부가 끝날 때마다 자유롭게 분과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학기술소수자 정책, 과학대중화 정책 등 인기 있는 분과로 사람이 몰리기도 해 진행자가 약간 조정을 하기도 했다. 각 분과에는 진행보조자라고 할 수 있는 ‘퍼실리테이터’가 한 명씩 배치돼 새로 온 사람들에게 이전 시간에 논의된 내용을 설명했다.


1부와 2부에선 참가자들이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꺼내는 시간을 가졌다. 포스트잇에 의견들을 적어 전지에 붙인 뒤 주제별로 묶어 생각을 정리했다. 이어 3부와 4부에서 심층토론을 한 뒤 5부에서 대선후보에게 던질 질문을 결정했다.

 

각 분과별로 13개(분과질문 10개, 공통질문 2개, 재치 있는 질문 1개)씩 질문을 만들었다. “노벨상을 정말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볼까?” “오바마처럼 자신의 정책을 논문으로 쓴다면 뭘 쓸지 물어보자” 등 분과와 관련 없는 질문을 만드는 논의도 활발했다.

 

 

타운미팅 2부가 끝나고 한 참가자가 분과에서 나온 의견을 전체 참가자 앞에서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타운미팅 2부가 끝나고 한 참가자가 분과에서 나온 의견을 전체 참가자 앞에서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참가자 전체투표로 최종 10개 질문 선정


참가자들은 특히 대선후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을 문제를 질문으로 만드는 데 골몰했다. 후보가 대답을 준비하며 해당문제를 새롭게 고민해보게 하기 위해서다. 후보가 어물쩍 넘어가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게끔 질문을 짜는 고민도 덧붙었다. 


청년과학기술자정책 분과에서 참가자인 ‘재활용쓰레기(별명)’가 “대학원생은 학생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며 “대학원생의 정체성에 대해 묻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참가자 ‘딴짓(별명)’이 “그럼 답변도 애매모호하게 올 테니, 그보단 이중 정체성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지 질문하자”고 덧붙였다. 결국 ‘대학원생이 노동자이자 연구원이며 학생인데, 이런 경계인들이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어떤 문제들을 겪는다고 생각하는가’로 질문이 정리됐다.

      
참가자들은 이날 만든 총 91개 질문 중 최종적으로 대선 후보에게 던질 질문 10개를 3월 초 온라인 투표로 선정할 예정이다. 현장에서 속기한 내용은 자료집으로 만들어져 참가자들에게 전달된다.

 

타운미팅에서 나온 의견들. - 변지민 기자 제공
타운미팅에서 나온 의견들. - 변지민 기자 제공

※참가소감 1.  박승현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4학년(별명 ‘길잡이’)
“내가 생각하는 과학은 이성적,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하는 마음에 ‘우주라이크’라는 과학대중화 활동도 하고 있다. 평소 관심 가지고 있던 주제로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내 생각도 정리가 됐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내 생각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간만에 마음껏 수다 떨 수 있어서 좋았다.”


※ 참가소감 2. 생물학 분야 연구원 ‘0.40(별명)’ 
“실험동물 윤리나 대학원생의 안전 문제 등이 내 관심 주제다. 위계질서가 없는 조건에서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서로 존중해서 듣는 분위기였다. 가까운 사람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공계 연구실의 문제점’을 연구실 바깥의 사람,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변지민 기자

he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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