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경 기자의 온도차 ⑦] ‘백신 공포증’의 습격

2017년 03월 01일 13:3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더 오래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고 일어나면 매일 새로운 이슈가 터져 나와서 그런 걸까요.

 

이슈 메이커의 중심에는 단연 트럼프 대통령이 있습니다. 얼마 전 ‘러시아 내통 스캔들’로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이 사임했지만 이후에도 ‘러시아 커넥션’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 뉴스(fake news)’를 언급하면서 주류 언론들과 전면전을 선포한 모양새입니다. 이 주류 언론에는 그간 트럼프를 비판해 온 CNN,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폴리티코, 버즈피드 등의 매체가 포함됐습니다. 

 

이달 24일 백악관 숀 스파이서 대변인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가진 비공식 브리핑에 이들 매체 소속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가 이들 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브리핑 출입 자체를 금지하는 초강수를 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앤드류 웨이크필드 박사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1998년 MMR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영국의 앤드류 웨이크필드 박사. - 유튜브 캡처

● 백신 안전성 논란 재점화?

과학계는 어떨까요. 기후변화 논란에 이어 이번에는 백신, 즉 예방접종 문제로 좀 시끄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방접종과 자폐증의 관계입니다.

 

발단은 밸런타인데이였던 2월 14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가진 학부모-교사 간담회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자폐 아동이 크게, 정말 크게 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라면서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발언만 놓고 보면 크게 문제될 내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오랫동안 ‘예방접종에 사용되는 백신이 자폐를 유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왔습니다. 

 

가령 2014년 9월 3일 트럼프는 트위터에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의사들의 거짓말이다.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미래를 (예방접종으로부터) 구하자”라고 올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캡처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4년 9월 트위터에 예방접종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글을 남겼다. - 트위터 캡처

트럼프의 말처럼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건 과학적으로 사실일까요. 이런 얘기가 나오게 된 계기는 1998년 2월 28일 저명한 의학저널 ‘랜싯(Lancet)’에 발표된 한 논문 때문입니다.

 

이 논문은 영국의 내과의사였던 앤드류 웨이크필드 박사가 교신저자로 돼 있으며, 자폐아 12명을 조사한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자폐아 12명 중 8명은 MMR(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 백신을 맞은 뒤 2주 안에 자폐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웨이크필드 박사를 포함한 논문의 공저자들은 정상적인 발달과정에 있던 아동이 어느 순간 자폐증을 보이는 경우 자폐증이 발현되도록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하는 특수한 환경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고 추론했고, 그 환경적 요인 중 하나가 MMR 백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웨이크필드 박사는 논문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MMR 백신과 자폐증 사이의 관계가 아직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논문 내용이 워낙 센세이셔널했던 만큼 영국 언론은 대서특필했습니다. 

 

특히 3가지 종류의 백신을 한번에 접종하는 방식(이는 3가지 종류의 바이러스를 체내에 한꺼번에 주입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이 안전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대중에게는 ‘MMR 예방접종 공포’까지 갖게 만들었습니다. 

 

의학계에서도 이 문제는 순식간에 큰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많은 의학자들이 이 논문의 진위를 검증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지만 MMR 백신과 자폐증과의 뚜렷한 상관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결정적인 일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브라이언 디어 선데이타임스 기자는 웨이크필드 박사의 논문에서 언급된 자폐아 12명 가운데 일부 부모들이 MMR 백신 제조사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 소송을 대리했던 법무법인이 당시 웨이크필드 박사가 근무하던 병원에 연구비 5만5000파운드를 지급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또 웨이크필드 박사 개인에게 건네진 돈도 40만 파운드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이 일로 웨이크필드 박사는 과학자로서 심각한 연구 윤리 위반으로 기소됐습니다. 논문 내용도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웨이크필드 박사의 논문을 출간한 랜싯 측은 즉각 논문을 철회했습니다. 웨이크필드 박사는 영국의 의사 면허 관리 기구인 종합의료협회(GMC·General Medical Council)에서 제명됐고, 영국 내에서 의료 행위 자격도 박탈당했습니다.

 

웨이크필드 박사는 미국에 머물며 여전히 MMR 백신과 자폐증과의 상관관계를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습니다.

 

●‘백신 안전성 위원회’ 꾸려지나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대로 미국에서 자폐아 비율이 치솟았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통계에 따르면 2000년에는 150명에 1명꼴이었던 자폐아가 지금은 68명에 1명꼴로 증가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그 이유가 MMR 백신 접종 때문이 아니라 자폐증 진단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의학계는 웨이크필드 박사의 논문에서 시작된 근거 없는 ‘MMR 백신 공포’가 예방접종률을 낮추고 있어 국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2000년 미국 보건 당국은 홍역 퇴치를 선포했지만 2014년 668명이 발병한 것으로 보고 됐습니다.

 

특히 2014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디즈니랜드 방문객에서 시작된 홍역이 동시에 145명을 감염시키면서 공중 보건에 구멍이 뚫린 사례가 확인됐고, 이후 초등학교 입학 시 ‘no shot, no enter(필수 예방접종을 하지 않을 경우 입학 불허)’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MMR 백신과 자폐증과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눈치입니다. ‘백신 안전성 위원회’가 꾸려질 것이란 얘기도 들립니다. 그간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고 강하게 주장해 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란 인물이 위원장으로 발탁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연기상을 두 차례나 거머쥔 개성파 배우 로버트 드니로도 백신에 대해서는 “무언가 잘못됐다”며 공개적으로 백신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미국 내 350개 이상 의학 관련 기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백신의 안전성을 인정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백신 공포증’이 트럼프 정부에서 다시 살아나는 건 아닌지 두고 볼 일입니다.


캘리포니아 주 얼바인=이현경 기자

uneasy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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