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부터 신산업 창출까지 현대과학의 '팔방미인' 가속기

2016년 10월 04일 09:11

2015년 12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연구자들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힉스 입자의 일등공신이었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또 하나의 신호를 포착한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까? 수개월 동안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부푼 기대를 안고 이 신호를 분석하는데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결론은 단순 오류, '잡음'이었다.


실망감은 컸지만, 포기는 없다. CERN은 오히려 LHC의 크기와 성능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가속기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 이른바 '미래원형충돌기(FCC. Future Circular Colider) 프로젝트'. 100테라전자볼트(TeV)의 고에너지 영역으로 양성자를 가속해 충돌하는 대규모 실험 장치다.

 

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 CERN 제공
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 CERN 제공

세계는 지금 치열한 가속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 외에도 일본은 2030년 가동을 목표로 원자 속 전자와 양성자를 가속해 충돌시키는 '국제선형입자충돌기(ILC)'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중국도 FCC와 비슷한 초대형 강입자가속기를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미국 역시 페르미 연구소에서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한 '듄(Dune)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가속기 경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은 가속기의 활용 방안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입자를 충돌시키면 에너지를 얻을뿐 아니라 우주의 생성과 기원을 탐색할 수 있다.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없는 미세 구조를 밝히는데도 활용할 수 있다. 가속기에서 나오는 입자를 다른 원자핵과 충돌시켜 소립자를 관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원자 자체가 변해 새로운 물질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렇듯 새로운 입자를 규명해 우주의 신비를 푸는 기초과학연구부터 희귀 동위원소 생성, 신물질·신소재 개발, 암 치료 등 신산업 창출까지 활용 범위와 분야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현재 구축 중인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의 위상과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지고 있다.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기는 중이온, 양성자나 전자 같은 입자를 가속하는 장치다. 보통 입자(particle)가속기라고 부른다. 전자기력을 이용해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까지 가속한다. 입자를 이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만큼, 가속기는 거대장치로 만들어진다. 현재 구축 중인 라온의 가속관 총 길이는 500m이고, 부대시설까지 포함하면 축구장 몇 배 크기의 넓이를 차지한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LHC의 경우 둘레가 무려 27km에 달한다.


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이하 중이온가속기사업단)은 전시회나 행사장에서 가속기의 원리를 쉽게 보여주기 위해 구슬이 담겨 있는 작은 원통을 사용하곤 한다. 원통 속의 구슬은 양극(+)과 음극(-) 가운데 한 가지 성질만 갖고 있다. 원통의 양 끝에 전원을 연결하여 양극과 음극으로 구분되도록 한다. 원통에 전기를 넣으면 양극(+) 성질을 갖는 구슬은 원통의 음극(-) 방향으로 굴러간다. 원통 끝의 전압을 높이면 구슬은 점점더 빠른 속도로 원통의 음극(-) 방향으로 이동한다. 원통을 가속관, 구슬을 입자로 생각하면 가속기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가속기의 원리는 실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TV나 컴퓨터 모니터로 사용했던 브라운관에 가속기 원리가 숨어 있다. 전자총에서 가속된 전자를 유리 뒷면에 있는 형광물질에 충돌시킨다. 이때 발생하는 빛으로 화면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브라운관이다.

 


20세기 초부터 개발…종류·활용 분야도 다양

 

강대국은 20세기 초부터 가속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가 1925년 원형으로 입자를 가속하는 최초의 '사이클로트론(고주파의 전원과 자기장을 이용해 입자를 회전운동으로 가속시키는 입자가속기)' 입자가속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로렌스가 '양성자 회전목마'라고 명명한 이 장치는 지름이 약 12cm에 불과했으며, 1931년 처음 가동 시 2,000V의 전압으로 8만 전자볼트(eV)의 출력을 얻었다. 이후 그의 조수들이 지름 27cm 크기의 두 번째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해 100만eV가 넘는 출력을 얻었다. 이후 가속기의 크기와 출력이 높아졌다. 어니스트 로렌스는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공로로 193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가 설립한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는 지금도 관련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입자가속기는 우선 가속하는 입자에 따라 종류가 나뉘고, 주된 쓰임새도 달라진다. 양성자를 가속하면 양성자 가속기, 전자를 가속하면 전자(방사광) 가속기, 이온화된 무거운 원자를 사용하면 중이온 가속기가 된다. 또 가속하는 방법에 따라 선형(직선형) 가속기와 원형(환형) 가속기로 나눌 수 있다.


방사광 가속기는 원자 속 입자 가운데 가장 가벼운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나온 강한 X선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원자나 분자 구조를 분석한다. 국내에서는 1994년 포항에 3세대 방사광 가속기를 완공한 데 이어 지난 4월부터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가동을 시작했다. 4세대 방사광 가속기는 강력한 X선 레이저로 수 나노미터(nm. 1nm=10억분의 1m) 크기의 극미세 구조를 분석할 수 있고, 펨토초(fs. 1fs=1,000조분의 1초) 시간 단위의 현상도 관측할 수 있다.


양성자 가속기는 글자 그대로 양성자를 가속한다. 원자핵을 쪼갤 때 나오는 양성자를 가속관에 통과시켜 엄청난 속도로 다른 핵에 충돌시키는 장치다. 물질의 핵을 깨뜨려 특성과 구조를 파악하는 동시에 물질을 변형시킬 수도 있어, 의료용 신물질 개발, 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바이오·나노 분야 연구 등에 주로 활용된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LHC가 양성자 가속기의 일종이다. 국내에서도 경주 양성자 가속기가 가동 중이다.

 

(좌)경주 양성자 가속기. (우)포항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가속관.  - 원자력연구원, 포스텍 제공
(좌)경주 양성자 가속기. (우)포항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가속관.  - 원자력연구원, 포스텍 제공

'가속기의 팔방미인'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


 

중이온 가속기에 사용할 중이온 생성장치(ECR). - IBS 제공
중이온 가속기에 사용할 중이온 생성장치(ECR). - IBS 제공

중이온가속기는 헬륨(He), 리튬(Li), 탄소(C), 질소(N), 우라늄(U) 등 다양한 원자를 이온화해 가속하는 장치다. 다양한 이온과 불안정한 핵종을 고에너지로 가속해 다른 원자핵에 충돌을 일으킨 후 원자핵이나 소립자를 분석하거나 신물질을 발견할 수 있다. 나노미터 단위의 초미시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현미경'인 동시에 새로운 원자핵을 만들 수 있는 '생성장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IBS 중이온가속기사업단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 시설로 개발하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멀티 플레이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라온은 초전도 선형가속관을 이용해 중이온을 광속의 50%에 가깝게 가속시키는 장치다. 무거운 원자에 양성자를 충돌시켜 희귀 동위원소를 생성하는 온라인 동위원소분리장치(ISOL)와 비행파쇄 동위원소분리장치(IF)를 동시에 접목하는 기술은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것이다. 라온은 ISOL과 IF의 결합을 통해 우주에 존재하는 동위원소의 80% 이상을 만들 수 있다.


라온은 가속기계 팔방미인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원소 발견과 중성자별 연구와 같은 기초연구는 물론 신소재 개발, 차세대 방사선 치료법 개발, 차세대 원자로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 제공, 핵폐기물 재처리 연구, 방사선 육종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성과 다양성이 큰 가속기인 만큼 한국 기초과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 크고 더 강력하게…세계는 지금 가속기 각축전


 

중이온 가속기의 시험장비를 둘러보고 있는 자문위원들. - IBS 제공
중이온 가속기의 시험장비를 둘러보고 있는 자문위원들. - IBS 제공

1980년대 이후 노벨 과학상 수상자 4명 가운데 1명은 가속기를 활용한 과학적 발견을 통해 그 영예를 안았다. 가속기는 현대 물리학과 기초과학의 최전선이다. 빅뱅 후 일어난 우주의 다양한 현상을 규명하는 것은 물론 암 치료와 신소재 개발 등 의료·산업 분야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첨단 장비이자 연구시설이다.


전 세계 강대국은 더 크고, 더 강력한 성능의 가속기를 개발‧구축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CERN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래원형충돌기(FCC)는 둘레가 무려 80~100km에 이른다. 일본의 국제선형충돌기(ILC)는 길이 31km에 무려 10조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중국이 계획하고 있는 초대형 강입자가속기 역시 둘레가 52km나 된다. 여기에 스웨덴도 가속 입자 크기와 회절각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차세대 방사광가속기를 개발했으며, 독일과 스위스도 4세대 방사광가속기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그동안 기초과학분야에서는 선진국들과의 격차를 쉽게 좁히지 못하던 한국은 중이온가속기 라온과 포항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갖추며 세계 가속기 경쟁 대열에 본격 합류하게 됐다. 이로서 한국 기초과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든든한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조 4,000억 원이 투입되는 라온은 오는 2021년부터 본격 가동된다. 라온이 국내 기초과학의 획기적 발전과 새로운 산업 동력 창출을 이끄는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 본 콘텐츠는 기초과학연구원의 온라인 뉴스레터
 
IBS 뉴스레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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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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