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타는 식물, 꽃 피우는 비밀

2017년 04월 05일 16:29

추운 겨울이 가고 싱그러운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단연 봄꽃이다. 산수유를 시작으로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필 때 봄은 절정을 이룬다. 식물은 어떻게 봄이 온 것을 알고 일제히 꽃을 피울까? 이 질문의 답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 과학자들에겐 수십 년간 풀지 못한 '숙원'과도 같았다. 식물이 낮의 길이와 온도의 영향을 받아 꽃을 피운다는 원리는 일찍이 알려져 있었지만,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비밀은 21세기 들어서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플로리겐 밝히기 위한 70년 여정

1937년 식물에 꽃을 피우는 호르몬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처음 제기됐다.식물생리학자 미카일 체일라칸(Mikhail Chailakhyan)은 꽃이 핀 단일식물(낮이 짧아지면 꽃을 피우는 식물)의 일부를 떼어 꽃이 필 수 없는 장일조건 상태에 있던 같은 종의 식물에 접붙였더니 꽃이 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꽃이 핀 식물에서 나온 어떤 물질이 꽃을 피울 수 없는 상태의 식물로 옮겨와 꽃을 피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체일라칸 박사는 이 실험을 토대로 식물에 개화를 유도하는 호르몬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했고 이 물질을 '플로리겐'이라 이름 붙였다.

 

식물은 낮의 길이와 온도의 영향을 받아 꽃을 피운다. 개화 호르몬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플로리겐인데, 그 실체를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 shutterstock 제공

그러나 플로리겐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플로리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가설과 방법을 내놓았지만,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1990년대 들어서야 식물학계는 백기를 들었다. 생화학적 방법으로는 플로리겐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생화학적 방법이 아닌, 유전공학의 힘으로 플로리겐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애기장대라는 식물이 식물학 분야에서 모델식물로 채택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애기장대의 유전체는 반복되는 DNA가 비교적 적어 유전자 분리가 용이하고, 유전자 복제에 유리하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꽃이 피는 애기장대와 피지 않는 애기장대를 만든 뒤 유전자를 비교했고, 꽃이 늦게 피는 돌연변이 애기장대 11종을 학계에 보고했다. 과학자들은 이 11종의 돌연변이 애기장대 유전자를 비교해가며 개화 유전자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1993년 국제 공동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화 유전자 '루미니디펜던스(LUMINIDEPENDENS)'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최초의 개화 유전자가 발견된 이후 약 10년 동안은 개화 유전자 발견 연구 성과가 봇물을 이뤘다. 10여 년간 10여 종의 개화유전자가 학계에 보고됐지만, 루미니디펜던스를 포함해 이 유전자들 모두 플로리겐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플로리겐의 정체는 1995년 독일 데트레프 바이겔 교수와 일본 타카시 아라키 교수가 FT(Flowering Locus T)단백질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FT단백질을 호르몬인 플로리겐으로 생각하기에는 분자량이 남달리 컸음에도, 큰 단백질 분자도 호르몬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추측되기 시작했다. 이후 2003년 일본의 고지 고토 박사가 FT단백질 유전자가 관다발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밝히고, 2007년 독일 쿠플랜드 교수 등이 애기장대와 벼에서 FT단백질이 잎에서 생성돼 생장점에 있는 정단조직으로 이동한다는 증거를 밝히면서 플로리겐의 수수께끼는 풀렸다. 정단조직은 바로 식물에서 꽃이 피는 장소다. FT단백질은 다른 어떤 호르몬보다 분자량이 큰 호르몬인 플로리겐이었던 것이다. 플로리겐 발견 논란은 70년 만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피오나1, FLM 등 다양한 개화 유전자 발견

플로리겐 연구가 워낙 오래 진행되면서 다양한 개화 유전자 및 물질도 함께 발견됐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의 남홍길 단장은 2008년 포스텍 교수 시절, 애기장대에서 생체주기를 조절하는 유전자 '피오나1(FIONA-1)'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연구결과는 식물학 분야 권위지 플랜트 셀(Plant Cell)에 게재됐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식물은 피오나1 유전자 때문에 생체 리듬을 24시간 주기로 맞춰 광합성을 언제 할지, 꽃을 언제 피울지 결정한다.

 

'슈렉'의 피오나 공주처럼 밤과 낮을 주기로 달라지는 식물 생체시계의 진동 주기를 은유화한 그림. 애기장대의 피오나 1번 유전자가 작동하지 못하면 생체시계가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27시간 주기로 인식하게 된다. - 포스텍 제공

2013년에는 식물의 FLM(Flowering Locus M) 유전자가 대기의 온도를 감지해 개화 시기를 조절한다는 것도 알려졌다. 고려대 생명과학과 안지훈 교수 연구팀은 57종의 애기장대를 다양한 기온 조건에 놓고 개화시기를 조사한 결과, FLM 유전자가 대기온도 변화를 인지하는 조절인자라는 것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기온이 20℃ 이하로 낮아지면 FLM이 대기온도 변화감지 단백질인 SVP와 복합체를 이뤄 개화를 앞당기는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해 개화 시기를 늦추는 것이다.


개화에 관여하는 자이겐티아(Gigantea;GI)라는 유전자도 유명하다. 자이겐티아는 애기장대의 생체 주기에서 식물의 일주기 간격과 폭을 조절하는 중요한 유전자다. 일주기에 따른 개화와 같이 생체 시계에 의한 현상들은 대부분 핵 속의 GI에 의해 조절되는데, IBS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 연구팀은 2013년 낮밤의 세포 내 GI단백질의 분포 형태 변화로 장일 식물의 개화 시기가 조절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낮이 긴 봄에는 개화가 일찍 이루어지지만, 밤이 길어지는 가을에는 개화가 늦어지는 장일 식물의 개화시기의 비밀을 푼 이 연구는 셀 리포츠(Cell Reports)에 게재됐다. 장일 식물인 애기장대에서 개화 유도 단백질인 자이겐티아는 핵 내에 골고루 퍼져 있거나, 단백질체인 핵체(nuclear body)에 모여 있는 두 가지 형태의 핵 내 분포가 존재하는데, 낮에는 골고루 퍼져있는 형태로, 밤에는 핵체에 모여 있는 형태로 주로 관찰됐다. 이러한 GI의 낮과 밤에 따른 핵 내 분포 형태의 변화가 개화 시기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같은 해 IBS 유전체 교정 연구단 연구팀은 식물의 생체 시계 유전자가 개화 시간을 조절한다는 결과를 뉴파이톨로지스트(New Phytologist)에 게재했다. 북미 사막기후에서 자라는 야생담배인 니코티아나 아테뉴아타에서 LHY(Late Elongated Hypocotyl)라는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했을 때, 꽃이 피는 시간과 향기가 나오는 시간도 바뀐다는 것을 관찰했다.


최근 연구, 개화시기 조절 메커니즘 규명

최근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의 곽준명 그룹리더와 김윤주 연구위원은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 Riverside)의 쉐메이 첸 교수팀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PWR단백질(POWERDRESS)이 식물의 성장 및 개화시기를 조절함을 밝혔다.

 

PWR과 HDA9 돌연변이체의 표현형. 이들 돌연변이체 애기장대는 대조군인 Col에 비해 개화시기가 빠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또한 PWR과 HDA9 돌연변이체는 열매 끝이 뭉뚝한 모양이었다(아래). 이는 PWR과 HAD9 단백질이 동일한 유전적 경로를 통해 탈아세틸화 작용을 함을 나타낸다. - IBS 제공

PWR 단백질의 유전자를 결여시킨 애기장대 돌연변이체를 관찰한 결과, 히스톤 단백질의 아세틸화가 증가했으며, 그에 따른 개화 유전자 발현 또한 증가함을 확인했다. 아세틸화는 염색체의 히스톤 단백질에 아세틸기가 붙으면서 뭉쳐있는 뉴클레오솜의 구조를 느슨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뉴클레오솜의 구조가 느슨해지면 DNA전사가 가능해 유전자 발현량이 증가한다. 이로써, PWR 단백질이 탈아세틸화 과정에 관여해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함을 밝혔다.


또한, PWR 단백질의 탈아세틸화 효소인 HDA9(Histone Deacetylase 9)와 PWR 단백질의 해당 유전자를 각각 결여시킨 돌연변이체를 관찰한 결과, 두 돌연변이체에서 아세틸화되는 히스톤 단백질들의 유전체 상위치와 발현 증가 유전자의 종류가 상당히 높은 상호 유사성을 보임을 확인했다. 두 돌연변이체는 서로 매우 비슷한 표현형을 보였는데, 두 개체 모두 정상 식물보다 개화시기가 빨랐고, 열매 끝이 뭉툭한 모양이었다. 즉, HDA9와 PWR 단백질은 동일한 유전적 경로를 통해 탈아세틸화 작용을 수행함을 밝혀낸 것이다.


유전체 분석 결과, PWR는 HDA9와 직접 결합해 복합체를 이루고, PWR 단백질이 아세틸화된 히스톤 단백질에 결합해 탈아세틸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PWR-HDA9 복합체는 애기장대의 개화 조절 유전자 중 하나인 AGL19의 탈아세틸화를 촉진함으로써 유전자의 발현 정도를 조절, 식물의 개화 시기를 조절함이 증명됐다. 연구성과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2016년 12월 게재됐다.


다양한 개화 유전자 및 단백질의 발견은 식물의 개화 시기 조절 메커니즘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PWR 단백질의 작용과 같이, 식물은 후성유전학적으로 DNA에 담긴 유전정보의 변화 없이도 자신의 생애 전반에 걸친 중요한 유전적 결정을 내린다. 개화나 열매와 같은 유전적 결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열쇠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나간다면, 우리가 보고 즐기는 꽃과 열매가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본 콘텐츠는 기초과학연구원의 온라인 뉴스레터 IBS 뉴스레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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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현 에디터

nearbl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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