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1명당 19만달러 투자… 전교생 967명 열정이 칼텍의 힘”

2011.04.21 00:00
[동아일보]

19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 캘리포니아공대(칼텍) 캠퍼스 애넌버그 빌딩. 물리학과 응용수학과 학생들이 수업하는 이 건물에는 복도나 휴게실 곳곳에 화이트보드가 설치돼 있다. 쉬는 시간이나 길을 가다가도 아무 때나 관련 내용을 토론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다. 2층 휴게실에서 만난 양자물리학의 대가인 존 프레스킬 교수 역시 캐나다에서 방문한 동료 교수와 물리학 토론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스티븐 호킹 교수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프레스킬 교수는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며 “칼텍을 지탱하는 정신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라고 말했다. ○ 구내식당 옆에 앉은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 120년 전 설립된 칼텍은 작지만 강한 대학이다. 교수 294명에 학부 학생수는 967명이니 교수 1명당 학생수가 3명으로 거의 ‘맨투맨’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매년 신입생 수는 총 250명 안팎으로 국내 과학기술대의 한 학과 입학생과 비슷한 수준이다. 신입생들의 미국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는 미국 내에서 최고로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과학영재들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최고의 학생과 교수를 바탕으로 한 소수 최정예주의는 칼텍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점을 가져다준다. 칼텍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이상원 고려대 화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생이 적기 때문에 교수의 강의 부담이 전혀 없다. 한 학기에 1과목만 가르치기 때문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칼텍의 노벨상 수상자는 31명으로 76명인 매사추세츠공대(MIT)에 뒤지지만 졸업생 중 노벨상 수상자 비율로 따지면 1400 대 1로 세계 1위다. 화학과가 있는 노이스 빌딩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루돌프 마커스(1992년) 아메드 즈웨일(1999년) 로버트 그럽스(2005년) 등 3명의 노벨 화학상 수상 교수들이 현재도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생리학 분야에서 1975년에 노벨상을 받은 데이비드 볼티모어 교수와 200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휴 데이비드 폴리처 교수도 현직이다. 즈웨일 교수의 연구그룹에 속해 있는 스펜서 배스킨 연구과학자는 “구내식당 옆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은 젊은 학생들에게 분발할 수 있는 영감을 주는 요소”라고 말했다. ○ ‘공부만 아는 얼간이’라고 불러도 좋아 미국 내에서 칼텍 학생들을 가리켜 ‘너드(Nerd·공부 외에는 별 재간이 없는 얼간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칼텍 학생들은 ‘너드’라는 비아냥거림을 훈장처럼 받아들인다. 레이먼드 프라도 학생처 부처장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상징하는 징표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KAIST 석사 후 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용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학습량이 엄청나지만 그 공부를 하고 싶어서 기꺼이 온 학생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공부한다”고 설명했다. 칼텍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강헌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경쟁이 심하지만 점수를 잘 받으려는 경쟁은 아니다. 칼텍을 졸업만 하면 학점에 상관없이 우수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명예(Honor) 시스템’이 있어 시험 볼 때 감독관 없이 오픈북이거나 도서관이나 집에 가서 해답을 찾아오는 시험지를 제출한다. 공부 범위를 시험에만 국한시키는 한국과 달리 창의성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매년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진행하는 ‘땡땡이의 날(ditch day)’ 행사는 학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 준다. 4학년 학생들은 학기 중 어느 하루를 임의로 정해 모든 수업 등 학사일정을 중단한 채 기숙사 방을 비우면서 후배들에게 숙제를 내준다. 기상천외한 문제들이 총동원되고 학생들은 신명나게 선배들의 테스트에 도전한다. 이 수수께끼를 푼 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푸짐한 상이 기다리고 있다. 졸업생들과 기업이 학교에 지원하는 기부금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은 또 다른 경쟁력의 원천이다. 학생 1명당 연구지원 액수가 19만2000달러(약 2억 원)에 달할 정도다. 또 자금이 많다 보니 연구 인프라가 우수하다. 화학과의 경우 관련 건물만 5개에 달한다.   ■ 학업 스트레스 해소 어떻게 “좌절 맛봐도 부족함 인정하니 마음 편해져”

19일 오후 밀리칸 도서관 3층 회의실. 칼텍 홍보팀에서 동아일보를 위해 한인 재학생들과의 라운드테이블을 주선했다.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면서도 학교생활을 충분히 즐기는 노하우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박사후(post-doc) 과정에서는 윤경식 바이오 뇌(腦)공학과 박사(26), 박사 과정에서는 신은철 씨(27·경제학), 학부에서는 이경하(23·물리학 4년) 루시아 안(22·컴퓨터공학 2년) 캐롤라인 김 씨(20·전기공학 2년) 등 5명이 참석했다. 안 씨는 “1학년 입학과 동시에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 계열기초 과목을 수강하면서 철저히 스스로가 깨지는 경험을 했다”며 “나보다 나은 사람이 많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말했다. 졸업을 앞둔 이 씨는 “학교는 24시간을 꼬박 공부해야 따라갈 수 있는 숙제의 양을 내주지만 누구도 그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며 “음악을 듣는 등 취미생활을 병행하고 친구들과도 더 적극적으로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학교생활이 편안해지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주변 친구가 6개 과목을 수강한다고 해서 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는 게 좋다”며 “자기 페이스를 잃고 무리할수록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 씨는 “힘든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도교수나 동료들에게 알리는 게 정신건강에 크게 도움되는 것 같더라”며 “수업과 관계없이 이뤄지는 학교 내 친교활동이나 종교활동 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말했다.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한국음식도 큰 활력소가 됐다고 한다. KAIST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은 윤 씨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학생들 간에 건강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그나마 어려운 학문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인간답게 하는 요소”라며 “주변 동료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미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학업활동을 할 수 있는 학교 차원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씨는 “칼텍에는 정해진 시간 내에 과제물을 마치지 못했을 때 담당교수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도 학과장이 재량으로 과제물 제출기간을 연장해주는 제도가 있다”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심리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는 장치”라고 말했다. 이 씨는 “학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생기는 동료애 역시 쉽지만은 않은 학업생활을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 재리드 휘트니 입학처장 “장학금, 성적 아닌 경제력 따라 지원”

“칼텍 경쟁력의 핵심은 작은 규모를 유지하면서 가용자원을 모두 학생들의 연구와 실험비용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도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학교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리드 휘트니 칼텍 학부입학처장(사진)은 1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칼텍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칼텍 학생을 정의하는 DNA는 무엇인가. “개별 학생이 지닌 자질이 다르고 학교 역시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려 노력한다. 입학하기 위해 중요한 점이라면 수학과 과학 분야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장학금 지급은 어떤 기준으로 이뤄지나. “성적이 아니라 학생의 재정상태 등 경제력에 따라 제공한다.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학교가 최대의 지원을 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물론 정학을 당하거나 불미스러운 이유로 징계를 받는 경우 장학금을 지급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시험 볼 때 주어진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아너(honor) 시스템’이 잘 가동되고 있다고 들었다. “칼텍의 빛나는 전통이다. 누구나 그것을 지키려 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자존심이 강하다. 칼텍의 시험은 집으로 시험문제를 가져가 주어진 시간 내에 제출하는 방식이지만 부정행위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교수와 학생은 물론이고 동료 사이에도 거의 완벽한 신뢰가 형성돼 있다.” 글·사진 패서디나(캘리포니아 주)=하태원 동아일보 특파원 triplets@donga.com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이 기사 어떠셨어요?

댓글 0

작성하기

    의견쓰기 폼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