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행동의 진화]새로운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랑

2021.04.04 06:00
MRI 스캐너로 촬영한 남녀의 키스 장면. 유투크
MRI 스캐너로 촬영한 남녀의 키스 장면. 유투브 갈무리

거의 모든 문화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관습이 있다. 사실 ‘거의’가 아니라, ‘전부’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문화에는 ‘결혼’이라는 관습이 있다. 결혼만이 아니다. 장기간의 연애도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우리 민족은 남녀가 오래도록 사랑하는 법이 없단 말이오!’라는 식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아주 오랜 과거부터 호모속에 속하는 남녀는 오래도록 알콩달콩 사랑에 빠졌다. 사실 결혼이라는 문화적 제도는 이런 본성적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뿐이다. 물론 사랑 없는 결혼도 있겠지만(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심지어 종종 헌신적 사랑은 내세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이성 간의 사랑은 흔히 성관계를 전제로 한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는 이성애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성욕과 관련된 감정이 처음 알게 된 연인을 가깝게 만드는 시작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친밀감과 상호 헌신, 깊은 애착이 결합한 은근한 사랑이 장기간의 연애 관계에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런 신뢰와 배려에 기반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상호 인정’이다.


연애 초기의 남녀를 생각해보자. 서로 조금씩 자신의 본 모습을 알려 나간다. 항상 멋지고 예쁘게 보이고 싶겠지만, 동시에 슬쩍 자신의 여러 측면을 은연중에 노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출에 대해 상대가 인정하고 좋아하고 감싸준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서로 ‘방귀를 터야’ 비로소 연인이라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일리 있는 이야기다.


완벽하게 꾸며진 모습만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다. 솔직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약간 부끄럽거나 민망한 부분을 보여주었는데, 그런데도 상대가 그런 면을 기쁘고 재미있게 받아들인다는 그 느낌이 연인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다. ‘그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의외로 귀여운데…’ 대충 이런 식이다. 연애 중인 남녀를 관찰한 한 연구에 의하면 서로 자기 노출을 많이 하고, 이를 서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커플이 더 깊은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애의 즐거운 경험은 주로 이러한 ‘뜻밖의 발견’으로 가득하다.


만약 모처럼 자신의 일부를 보여주었는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뭐, 어쩔 수 없다. 슬프지만, 천생연분이 아니라고나 할까? 깊고 오랜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과정이다.

 

심장 엑스레이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왜 오래 사랑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꼭 오래오래 사랑해야 하는 걸까? 잠깐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인스턴트 사랑이라고 해서 안될 것은 없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끈끈하고 오랜 사랑은 단지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인류는 다른 유인원과 달리 자원의 세대 간, 성간 공여가 아주 활발한 종이다.  자원을 남녀가 공유하고, 부모 자식도 자원을 공유한다. 세대 간 분업, 성적 분업을 통해서 더 효율적인 생존과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협력이 없다면 적합도가 크게 떨어지는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았다. 산업혁명 이전부터 인류는 분업을 통해 생존 가능성을 높여왔고, 그때 빚어진 마음의 모듈은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 사회에서야 부부가 각자 경제활동 하면서, 각자 살아도 생존에는 별로 지장이 없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빚어진 정서와 행동 시스템이 그리 쉽게 바뀔 리 없다.


이러한 자원 공유 및 번식적 협력 과정은 상호 신뢰를 통해서 가능하다. 가족 내 강력한 애착이야말로 장기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접착제다. 상호 헌신을 통해서 공동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이다. 옥시토신을 비롯한 몇몇 신경전달물질이 이러한 애착을 촉진한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도 이러한 부부 협력을 강화한다. 심지어 부부는 상당한 재산을 서로 증여해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부부니까 그런 것은 당연하다는 공감대가 법과 제도에 이미 반영된 것이다. 돌봄을 주고받는 대상과 맺는 강력한 본능적 동맹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신호

연인 간의 사랑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지안 곤자 교수 등은 연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 확신의 신체적 단서를 연구해서 2001년 발표했는데, 논문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친밀한 손동작이다. 상대를 가리키면서 손을 흔드는 것인데, 물론 삿대질처럼 공격적이어서는 안된다.


둘째, 뒤셴 웃음이다. 프랑스의 신경심리학자 기욤 뒤셴이 처음 말한 미소인데, 억지 미소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미소다. 대관골근과 안륜근을 포함하는 웃음이다. 좀처럼 꾸며내기 어려운 표정이다.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가고, 눈에 주름이 보이며, 광대가 승천하는 그런 미소다. 상냥한 종업원의 미소는 언뜻 보면 웃는 것 같지만, 사실 그냥 지어낸 웃음이다. 종종 팬암 미소라고 한다. 진심이 없는 항공기 승무원의 미소라는 것이다. 뒤셴 웃음은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미소다.


셋째, 상대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자세다. 몸통 전체가 앞으로 기우는데, 이러한 자세도 역시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주로 나타난다.


넷째,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행동이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관찰해보자. 손으로 서로 가리키고,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보이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거의 본능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심지어 상대를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일어난다. 혼자 그이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까닥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인들은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사랑을 가늠한다. ‘왠지 평소와 달리 쌀쌀맞은데’하는 느낌은 신체적 신호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서 얻는다. 아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억지 미소. 뭔가 예전보다 줄어든 고개의 까닥거림. 그 신호를 간파한 연인은 불길한 예감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사랑

사랑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자발적으로 중단시키는 기능도 있다. 지금의 연인과 결속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다른 가능성의 탐색을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가 있으니,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라는 수준이 아니다. 현재 사랑하는 연인과 새로운 대안을 비교하고, 지금의 연인을 더 높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수준이다.


정말 그럴까?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헌신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보통 사진보다도 더 짧은 시간 주의를 기울였다.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는 ‘사진 속 미녀보다도 영희가 더 예쁘다’라고 여기는 정도를 넘어서, ‘영희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정도가 되었다. 말 그대로 ‘눈먼 사랑’이라고 할까?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언제나 그런 것도 아니다. 개인차도 있고, 지역차도 있고, 심지어 같은 사람도 여러 상황에 따라 달리 반응한다. TV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을 본 사람은 잘 알다시피, 다양한 대안적 전략도 인간 세상에는 늘 난무한다. 모든 사람이 항상 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사랑에 관한 수많은 비극도 없었을 테다.


그러나 인류가 가진 사랑의 디폴트값은 분명 장기적이고, 헌신적이며, 상호 유일한 사랑이다. 다

른 사랑은 변칙이다. 다른 종에서는 좀처럼 관찰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인간성의 한 측면이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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