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에서 지상으로, 태양전지의 승리

2013.07.11 17:05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10월 4일 금요일 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국제지구관측의 해’를 기념하여 개최된 ‘로켓과 인공위성’이라는 학술세미나의 뒤풀이격 행사였던 터라 모처럼 동서 양 진영의 과학자들이 마음껏 의견을 나누며 궁금증을 풀 기회였다.


당시 소련은 우주개발계획을 1급 비밀로 취급하고 있었던 탓에 미국 과학자들에게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당연히 가장 큰 관심사는 소련의 계획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가였다. 그저 덩치만 큰 농업국으로만 여겨졌던 소련이 과연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다.


끈질긴 미국 과학자들의 질문공세에 긴장이 풀린 소련 과학자 중 한 명이 1주 아니면 한 달이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해버리고 말았다. 이 말이 술김에 내뱉은 너스레라고 생각했었는지 미국 과학자들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소련이 미국보다 인공위성을 먼저 발사하리라는 말은 아무리 좋게 봐도 농담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됐던 것이다.


그러나 파티장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파티에 참석한 뉴욕타임스 기자, 월터 설리번은 회사로부터 긴급한 전화를 받았다.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고 한다. 소련 타스 통신으로부터 타전된 소식이니 빨리 확인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설리번은 파티장으로 뛰어 들어가 소련의 인공위성이 정말로 올라갔다고 알렸고 미국 과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파티를 즐기는 동안 스푸트니크는 그들의 머리 위를 벌써 두 번이나 지나치고 있었다. 미국에는 모처럼 겪은 대굴욕, 소련에는 기가 막힌 한 방이었다.

그리고 우주시대가 시작됐다.





미국만 스푸트니크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 아니다. 미국 최초의 위성으로 기대를 모으던 뱅가드 1호에도 스푸트니크가 두고두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당시 미국의 로켓 개발 계획은 해군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군이 독자 개발하던 뱅가드 로켓에 뱅가드 1호 위성을 실어 1958년까지는 쏘아 올리려는 계획이었는데, 스푸트니크로 체면을 구긴 미국이 재촉하는 통에 계획을 일 년 앞당겨야 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첫 번째 발사에서 뱅가드 로켓은 고작 2초 동안 땅에서 1m ‘점프’하는 데 그쳤고 두 번째에서도 14초 만에 폭발해버렸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미국에 보낸 공식 조문에서 뱅가드(Vanguard, 선봉)보다 리어가드(Rearguard, 후위)로 부르는 게 낫겠다고 비꼬아서 백악관의 심기를 긁어놓았다. 미국 언론조차 뱅가드에 ‘플롭닉(Flopnik)’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조롱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스푸트니크에 빗댄 ‘자빠지니크’쯤 되는, 치욕스러운 별명이다.


해군과 뱅가드 프로젝트는 신뢰를 잃었고 로켓개발의 중심은 육군의 베르너 폰 브라운 팀으로 넘어갔다. 브라운은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면서 기대에 부응했다. 뱅가드 1호는 미국 최초, 어쩌면 인류 최초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미국의 인공위성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태양전지 분야에서는 선봉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바로 최초로 태양전지를 실용화한 사례였던 것이다.




당시에도 태양전지 자체는 그렇게 신기한 기술까지는 아니었다. 이미 1839년에는 프랑스의 과학자, 에드몽 베크렐이 화학전지의 전극에 태양광을 쬐면 평소보다 많은 전자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1873년이면 윌러비 스미스가 셀레늄에 빛을 쬐어 전자가 발생함을 보여주었다. 1905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러한 현상들을 ‘광전효과’라는 이름으로 이론적인 해석을 제공하면서 빛을 이용한 발전방법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20세기 초반, 태양광 발전은 SF 분야에서는 유행과도 같았다. 아서 클라크는 1945년 발표한 작품에서 이미 태양광으로 전기를 얻는 우주정거장을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광 발전은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 ‘거저’나 다름이 없었다. 수력발전처럼 엄청난 규모의 공사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화력발전처럼 막대한 양의 연료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터빈과 발전기로 구성된 엄청난 규모의 장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태양광은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무제한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1954년, 미국 벨연구소에서 실리콘 기판을 베이스로 한 태양전지 시제품을 발표하면서 클라크의 꿈이 현실화되었다. 태양광발전의 엄청난 가능성은 곧 미 육군 통신대 사령관인 제임스 오코넬의 관심을 끌었다. 미 육군의 통신대는 부대 간 통신뿐 아니라 전 육군의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는 막중한 책임도 떠안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극비리에 추진되던 우주개발계획은 통신대의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우주로 쏘아 올릴 첨단 기계장치에 어떻게 전기를 공급할 것이냐는 난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코넬은 통신대에서 전력공급장치에 대한 연구를 이끌고 있던 한스 지글러 박사에게 태양전지에 대해 알려주고 실용화할 수 있겠는지 알아보도록 요청했다.


지글러 박사는 벨연구소를 방문해 태양전지를 직접 보자마자 이 새로운 기술에 빠져들었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실리콘 태양전지가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 이 기술이 얼마나 폭넓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지 설파했다. 지글러는 태양전지 기술이 무르익으면 건물의 표면을 태양전지가 덮어서 별도의 발전소 없이도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곧 지글러와 동료는 곧 태양전지를 통신대 업무 전반에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망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글러는 몇 달 동안이나 매달린 끝에 태양전지를 통신대의 업무 전반에 적용하기는 불가능하겠다며 두 손 들어버렸다. 태양전지는 태양 빛이 비출 때만 작동했기 때문에 밤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전력 효율도 형편없었다. 벨연구소가 개발한 초기 태양전지는 에너지 효율이 4%에 불과했다. 지표면에 내리쬐는 태양 복사에너지는 1㎡당 1,380Wh인데,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전기에너지가 55Wh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나마도 열로 손실되는 에너지까지 포함한 수치니 실제 태양전지가 생산하는 전력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대기에 의한 에너지 손실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 뒤편의 그늘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태양전지판의 방향과 위치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온종일 최대 효율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매력은 발사 중량을 크게 줄이면서도 오랜 기간의 작동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의 미숙한 로켓 기술로는 우주에서 사용할 에너지원을 함께 쏘아 올리기란 불가능했다. 당장 쏘아 올릴 위성만으로도 무거워서 크기와 중량을 줄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판에 한가하게 전력생산용 연료 따위를 실을 공간 따위는 로켓에 없었다. 게다가 화학전지 등의 다른 전원에 비해 오랜 시간 동안 전력을 꾸준히 공급할 수 있었다.


지글러 박사는 당장 통신대의 일상 업무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인공위성용 에너지원으로는 태양전지가 가장 훌륭한 해결방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를 받은 오코넬은 이를 곧 육군의 로켓개발계획, ‘런치박스 계획’에 적용하기로 했지만 중요한 변수가 생겼다. 육군이 아닌 해군이 미국 최초의 로켓을 발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로켓 개발 계획은 중구난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의 육군과 해군, 공군은 서로 군 내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때로는 이런 신경전이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곤 해서 공군에서 도입한 항공기를 해군은 수령을 거부하는 식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켓 기술도 마찬가지로 육해공군이 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진하느라 자원이나 인력 낭비가 심한 편이었다. 초기 우주경쟁에서 소련이 우위를 점했던 것도, 미국과 달리 단일한 체계하에 효율적으로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통정리 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선정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의 주역이 해군의 뱅가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육군과 달리 해군은 태양전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글러는 당장 해군으로 쫓아가서 태양전지를 인공위성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직 미완성이고 안정성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지글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해군은 육군과 공군을 찍소리하지 못하게 할 만한 당장 성과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태양전지라는 신기술이 충분히 테스트 되어 최대한 이른 시간에 실용화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개발에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때라 인공위성에 성공적으로 적용해서 제대로 작동해준다면 태양전지 연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다행히 민간 과학자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주개발은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신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프로젝트였으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지글러는 저명한 과학자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소속인 지글러의 발언과 민간 과학자들의 발언은 파괴력이 달랐다. 과학자들은 곧 여론을 움직였으며 여론은 다시 육군 통신대가 인공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시스템 개발을 담당하게 하도록 해군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해군은 여론에 밀려 뱅가드 위성의 전원을 태양전지로 결정하고 이를 육군 통신대에 맡겼다.

육군 통신대는 곧 벨연구소에서 라이센스를 얻어 태양전지를 생산하던 호프만 전자회사와 접촉했다. 육군 통신대가 세부 사양을 정하면 이에 따라 호프만 전자회사가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길이가 고작 1cm도 되지 않는 태양전지판이었지만 여러 장 모으자 위성을 움직일 정도의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을 한데 모아 충격이나 대기와의 마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화유리로 보호한 케이스에 넣어 실제 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모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뢰성이었다. 우주 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발사 시의 충격이나 고온에 견딜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두 대의 미사일 탄두부분에 태양전지 모듈을 부착하고 발사하는 실험까지 했고 성공도 했지만, 해군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입장이었다. 해군의 대변인은 계속해서 최초 네 대의 위성은 전통적인 방식의 화학전지를 전원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해군으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라는 막대한 중책을 수행하느라,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판국에 이제 막 테스트를 시작한 기술을 전력공급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학전지가 무겁고 수명이 짧기는 했지만, 거의 확실하게 정상 작동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태양전지 모듈을 부착하고 보조 전원으로 화학전지도 가져가자니 가뜩이나 빠듯한 페이로드가 모자랄 판이었다. 그리고 뱅가드 프로젝트의 칼자루는 어디까지나 해군이 쥐고 있었다.





도움 손길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은 더 늑장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제대로 체면을 구긴 미국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위성을 발사해서 ‘우리 소련과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것도 아니거든?’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뱅가드 프로젝트에도 비상이 걸렸다. 최초 계획됐던 기능들이 대거 빠졌으며 그저 위성이 제대로 살아있음을 알리는 송신장치만 부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육군 통신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애초 싣기로 했던 장치들이 대거 취소되자 로켓의 중량에 제법 여유가 생겼다. 인공위성에 슬쩍 태양전지 모듈 몇 개를 끼워 넣는다 해도 해군의 양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해군으로서는 태양전지 모듈 따위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해군의 위신을 떨어뜨린 몇 차례의 난항 끝에 1958년, 성 패트릭 축일에 뱅가드 1호가 마침내 발사되었다. 해군은 결국 태양전지 모듈에 자리 한편을 내주었다. 태양전지를 신뢰해서는 아니었다. 여전히 해군은 태양전지에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발사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해군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발사 19일 후 뉴욕타임스의 헤드라인은 “화학전지는 지금쯤 고갈됐겠지만, 태양전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였다.


사실 태양전지 모듈은 뱅가드 1호에게도 행운이었다. 자칫 스푸트니크와 익스플로러보다 늦고 크기도 한참 작은 주제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빕...빕...’ 신호 보내는 것이 전부일 뻔했던 위성이 과학계에 한 획을 그은 주인공이 된 것이다.


뱅가드 1호의 태양전지는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성과였다. 뱅가드 1호를 통해 태양전지가 우주공간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화학전지를 탑재했었다면 고작 몇 주 만에 작동을 멈췄을 인공위성들이 몇 달, 몇 년씩이나 쌩쌩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어떤 전원장치도 태양전지만큼이나 우주공간에서 오랜 시간 전력을 공급하지 못한다. 태양전지가 없었다면 거대한 국제우주정거장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GPS 장치나 위성통신도 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어찌 이용한다 하더라도 몇 달마다 한 번씩 위성을 쏘아 올리든, 아니면 수시로 우주왕복선을 올려 보내서 전원을 교체하든 꽤 번거로워졌을 것이다. 이래서는 유지비나 이용료도 비쌌을 테고 지금처럼 보편적인 사용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에서 활약을 한껏 펼친 태양전지는 이제 지상으로 내려왔다. 실리콘 태양전지는 효율이 40%를 넘어 50%를 넘나드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유기태양전지 기술의 발전으로 적용분야도 다양해졌다. 지상에서도 충분히 실용적인 사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미 유기태양전지를 겉면에 씌워 별도의 전력이 필요하지 않은 텐트나 전원공급이 필요없는 태양전지 가로등이 시판되는 세상이다.


클라크와 지글러는 집과 건물을 태양전지가 뒤덮어서 생활에 필요한 전원을 공급하는 상상을 했지만, 이제는 그 수준을 넘어서서 옷에도 태양전지를 부착해서 이동하면서도 언제든 전기를 사용 가능한 기술도 실용화를 앞두고 있다. 하늘에서 우주시대를 연 태양전지는 이제, 땅에서 모바일시대를 열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지글러의 확고한 믿음과 스푸트니크의 예상치 못한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모바일 태양전지도 몇 년은 늦어졌을지 모른다. 태양전지는 의도치 않은 계기로 우주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땅으로 내려온 셈이다.


* 본 콘텐츠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온라인 뉴스레터 KOITA IN 17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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